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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3일 토요일

호랑이, 민족의 얼을 담다

‘조선 사람은 반년 동안 호랑이 사냥을 하고, 나머지 반년은 호랑이가 조선 사람을 사냥한다’

–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shop,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 선교사 비숍이 자신의 여행기에 남긴 어록이다. 그의 어록을 통해 우리 선조들과 호랑이가 오랜 시간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호랑이에 대한 글이 무려 300여 건이나 명시돼 있다. ‘창덕궁 후원에 범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북악에 가서 표범을 잡고 돌아왔다’(1465년 9월 14일 세조 11년)는 내용처럼 호랑이와 관련한 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 범의 개체 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제집 드나들 듯 조선 땅을 활보하던 호랑이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시행된 해수구제사업이 그 이유다.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들의 안전을 위해 전국의 호랑이와 표범을 집중 사냥한 뒤로 우리나라에서 호랑이는 사실상 멸종됐다.

비록 호랑이는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정신과 문화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삼육대신문>은 민화와 서적을 통해 남아 있는 조선 호랑이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호랑이 그림 2’ 전시회를 찾았다. 오는 9월 4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2층 서화실에서 만날 수 있는 ‘호랑이 그림 2’는 앞선 ‘호랑이 그림 1’에 이어 18편의 작품을 전시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호렵도>

<호렵도>는 만주족들이 말을 타고 호랑이를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제3폭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검은 말을 탄 사내가 시종 및 군사들과 함께 있다. 제5~8폭은 만주족들이 범(虎)을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4폭에서는 만주족들이 사냥한 범(虎)들이 말에 실려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복장이 아닌 만주족의 인물이 묘사돼 다소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궁중에서 벌어진 청황제의 가을 사냥을 담은 <호렵도>는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는 가치관과 오랑캐를 무시하는 상반된 입장이 내포된 그림이다. 초기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제작됐으나 점차 민화로 변화해 우리 민족에게 액막이와 길상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표피무늬 병풍>

표범 무늬가 가득 펼쳐져 있는 <표피 무늬 그림>은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작품이다. 엷은 노란색 바탕과 가느다란 선으로 털을, 짙은 먹으로 점을 찍어 표범 무늬를 표현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임금이 공이 많은 신하를 대상으로 특별히 표피를 하사했다. 신하들은 귀한 하사품인 표피를 집안에 걸어 임금에 대한 감사를 드러내곤 했다. 호랑이 장식품을 전시함으로써 호랑이의 영험함으로 잡귀를 쫓거나 집안을 위엄 있게 만들었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단호흉배>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호수흉배>

조선시대 관원은 깃을 둥글게 만든 관복인 단령을 입고 가슴과 등에 흉배를 부착해 계급과 지위를 나타냈다. 기린, 사자, 공작, 백한 등 다양한 동물이 그려진 흉배 중 호랑이 흉배는 무관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진 흉배는 정3품 이하 무관이, 두 마리가 그려진 흉배는 정3품 이상 무관이 착용했다. 군사 일을 도맡아 적을 공포에 떨게 하는 위엄 있는 무관의 모습이 호랑이와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항우와 우미인이 이별하다>

<항우와 우미인이 이별하다>를 통해 다른 나라에서는 호랑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위 그림은 중국 고전 <초한연의>의 초나라 항우와 그의 연인 우미인이 이별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한나라 유방과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 전, 두 남녀의 작별 인사는 관람객에게 슬픔을 유발한다. 애절한 이별 장면 사이, 항우가 앉아 있는 의자가 눈에 띈다. 호랑이 가죽으로 덮인 의자는 가장 용맹한 장수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요소다. 중국 역시 무관의 기개를 드높이기 위해 호랑이를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호작도>

마지막 작품 <호랑이>는 꼬리로 몸을 두르며 두 눈을 크게 뜬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태백산맥같이 곧게 뻗은 등, 몸을 단단히 지탱하는 다리와 반대로 표정은 익살스럽다. 짓궂은 얼굴 위 선명한 이마 무늬는 한자 왕(王)의 형태를 보인다. 품위 있지만 어딘가 친근해 보이는 모습이다.

호랑이의 습격을 뜻하는 ‘호환’의 피해 수준은 가히 재해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피해만 수백 건이다. 선조들은 위협적인 존재였던 호랑이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민화를 통해 해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호랑이에게 받은 상처를 포용했다. 현실의 어려움에 저항하고, 아픔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민족의 얼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호랑이 그림 전시회를 통해 부정을 긍정으로 변화시키려는 선조들의 정신을 느껴보길 바란다.

임민진 기자 <septmimij@naver.com>

윤상현 기자 <dany999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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